#최치원
세상에서 신라를 논할 때면 산에 대해서는 반드시 두류와 가야와 청량을 말하고,
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동명과 동락을 말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문창(文昌) 최 선생을 말한다.
출처 입력
선생은 약관이 되기도 전에 중국 조정에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23세 때에는 절강(浙江)의 적도인 황소를 붓으로 꺽었는데, 이에 천자가 어대를 하사하고 천하가 그 문장을 암송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어지러운 나라에는 더 있고 싶지 않았으므로 은하에 열수가 벌여 있는 나이에 조서를 받들고 금의환향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신라로서는 엄청난 행운을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좁은 나라였고 어찌 사해의 제일가는 인물을 용납할 수가 있었겠는가? 당나라는 개국 이래 19명의 황제를 거치고 나서 탕산의 부로가 새로 하늘의 총애를 받았고, 신라의 삼성은 49명이 왕위를 전하고 나서 보리의 당부가 거듭 일어나는 가운데 음탕한 여제가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선생이 어떻게 이를 부지할 수가 있었겠는가?
선생이 일단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된 뒤에는 해운대와 임경대와 월영대에서 고신의 분개한 회포를 풀 수 있었고, 두류의 암문에서 널리 구제하려는 뜻을 보였으며 청량의 기판에서는 승패의 운수를 관찰하였고, 가야의 유수에서는 시비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이를 통해서 선생이 불행해지면서 산천과 조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을 실로 우리 동방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문학가였다. 그리고 삼천리강산에 예의의 풍속이 있게 된 것도 선생이 실로 창발시킨 공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선생의 문구에 왕왕 범어가 섞여 있는 것을 흠으로 여기기도 하나, 선생의 학문은 사술과 육경에서 인을 근본으로 삼고 효를 시작으로 삼는 것을 종지로 하였다.
선생은
"부처가 삼법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기 어려운 것과 같다." 라고 하였고,
노장과 불교가 이도라고 못박으면서 말하기를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 불일을 다시 맞이하여 공색을 분변하니 교문이 이로부터 계척을 나누게 되었다." 라고 하였으며,
장자방이 적송자를 따라 노닐었다는 설을 배척하며 말하기를
"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학의 등 위의 허깨비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상 세 가지의 말을 가지고 유추해본다면, 선생이 원한 것은 공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선생이 승려와 어울려 노닐었던 것은 멀리 은둔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요, 어느 날 아치멩 일찍 일어나 숲 사이에 신발을 남겨 두었던 것은 인간 세상에 다시 살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일 따름이다. 이 밖에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점필 김종직 선생의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났다 말할 뿐,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 라는 싯구야말로 천고의 의혹을 풀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선생은 《경학대장》 이라는 책 1권을 저술하여 성리를 드러내 밝혔는데, 이는 암암리에 시대를 앞서서 송유의 주장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선생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경을 애송하는 정도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경학대장》 을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시문조차 읽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고는 오직 《사산비명》 하나가 사방에 전파되었으므로 이를 통해서만 방불한 모습을 구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고운 선생의 참 모습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선생이 산택에서 소요하며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은 것은 명승지에서 지내려 함이 아니라 오직 왕씨의 조저에서 몸을 더럽힐까 염려한 나머지 처음에는 미륵으로 벗을 삼다가 끝내는 기러기처럼 아득한 하늘을 날아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계원필경》 과 《경학대장》 은 이미 각각 1책씩 간행하여 배포하였지만 《사륙집》 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치 책에 기재된 것이 이처럼 허술하게 되었으니 후학이 함께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 병인년(1926) 6월 하순에 후학 광주 노상직은 삼가 쓰다.